- 명소 : 심슨기념관
-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3호
- 시대 : 1915년
- 소재지 : 서울시 중구 정동 32-1
이화여자고등학교 캠퍼스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1915년에 미국인 사라 J. 심슨(Sarah J. Simpson)이 위탁한 기금으로 세워졌다.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로 6·25전쟁 때 붕괴되었다가 1960년대 초에 복구하였는데, 남쪽 건물의 외관을 처음 건축할 때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으며, 뒷부분은 현대적인 외관으로 처리하였다. 외관을 붉은 벽돌로 지은 철근콘크리트구조의 근대 건축물로, 학교건축의 초창기 서양 건축양식을 도입하였다.
이화여고의 역사를 담은 전시관이 있어 시대별 고등학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옆에 있는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선 다양한 문화공연을 하고 있다. 공연을 위해 찾아왔다면 한번쯤 심슨기념관에 있는 이화박물관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2009.1.2일부터 ~ 2010.9.17일까지 심슨기념관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이화박물관은 휴관이다.
- 명소 : 정동교회(貞洞交會)
- 지정번호 : 사적 제256호
- 시대 : 1896년
- 소재지 : 서울시 중구 정동 34번지 3호
서울시립미술관(전 대법원 건물) 서쪽의 정동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회로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교회는 조선말부터 교회 사업으로 의료·사회사업을 벌여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개화기 때 이 교회를 양반교회, 귀족교회라고 불렀다. 이는 정동 제일교회(정동 34번지) 건물 그 자신의 모습 때문에 주는 인상이기도 했다. 교회 초기 교인들이 관리들과 이른바 신흥귀족계급이 주를 이룬 것은 그 장소성에 큰 이유가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 개신교 교회는 의료·교육·사회사업을 벌여 우리나라 근대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 1858~1902) 신혼부부는 1884년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 이듬해 1885년 2월, 일본을 경유하여 이해 4월 5일(부활절)에 아펜젤러 선교사는 장로회 언더우드 선교사와 같은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하였다. “갑신정변 여파로 상황이 좋지 않다”며 부인의 입경을 만류한 미국 공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아펜젤러 선교사는 부인과 같이 일본으로 되돌아갔다가 같은 해 7월 19일 조선에 재입국하여 서울에 들어왔다. 이 당시 정동의 스크랜턴 선교사집 서쪽(정동 34-1번지)의 한옥을 구입하여 이들 가족과 이웃하였다.
아펜젤러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감리교회를 시작한 것은 1887년 10월 9일이다. 우선 중구 남대문로 3가 110번지의 집 하나를 마련하여 배재학당 학생들의 성경 공부방으로 사용하면서 이 집을 ‘벧엘 예배당’이라 하였다. 이 예배당 위치는 현재 한국은행 본점 자리로 비정된다. 5평도 되지 않는 자그마한 이 집에서 10여 명이 예배를 보니 비좁기도 하지만 남녀가 유별한 그 당시에 남녀가 한 방에 모이는 것이 외부에 시비 거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12월 초에 이보다 두 배가 넓은 방을 구입하여 방 가운데에 휘장을 치고, ‘간막고’식의 예배를 보았다.
‘벧엘 예배당’의 집회는 1888년 5월에 정부에서 내린 ‘전교 금지령’과 뒤이어 일어난 ‘아기소동’으로 중단되었다. 선교사들은 이해 12월, 정동 구역회를 조직하면서 (1) 남녀가 다른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고 (2) 가급적 찬송은 부르지 말고 (3) 찬송을 할 경우엔 가사만 읽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남자 집회는 배재학당·정동병원·벧엘예배당에서, 여자 집회는 이화학당과 보구여관에서만 예배를 보았다. 배재학당 강당에서는 매일 아침 기도회가 있었다. 따라서 정동교회의 출발은 배재학당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펜젤러가 선교사인 동시에 배재학당 당장이었기에 가능했다.
비록 찬송 없는 예배였지만 교인 수는 점점 늘어 1892년에는 두 곳의 집회에 200명이 넘었다. 그러자 1894년 12월, 정동의 남녀 교인들이 남녀가 함께 예배를 볼 수 있는 예배당 건축을 결의하였다. 그때 아펜젤러의 바램은 5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예배당을 서양식으로 짓는 것이었다. 8,000달러가 넘는 건축비는 교인들의 건축 헌금과 대부분 아펜젤러가 미국에서 모금해 왔다.
새 교회는 고종 32년(1895) 8월 7일, 스크랜턴의 시약소(施藥所) 병원 자리(정동 34번지 3호)의 한옥을 헐고, 이 해 9월 9일에 정초식을 하였는데 이 때 법부대신 서광범이 축사를 하였다.
이 당시 미국인 선교사들은 일본 요코하마에서 서양식 교회를 경험한 바 있는 일본인 건축가에게 교회 설계를 의뢰했다. 이에 요시자와 토모타로(吉澤友太郞)가 설계를 맡았고, 조선인 심의석(沈宜燮)이 시공을 했다. 붉은 벽돌조의 이 예배당은 정동 거리의 상징적인 건물이었다. 이 교회는 우리나라 최고의 교회란 뜻의 ‘하이 처치(High Church)’라고도 불리었다.
1896년 12월에는 지붕을 올릴 수 있게 되었고, 1897년 12월 26일에 정동교회 봉헌식을 거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건물의 완공은 이듬해 고종 35년(1898) 12월 26일에 이루어졌다.
고딕풍의 이 교회는 그림 속에 보이는 유럽의 전원건물을 연상케 하는데 내부는 평평한 천정에 기둥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어 매우 간결하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이 예배당은 장안의 명물이 되어 인근 각처에서 구경꾼들이 줄을 이었다.
이 때 준공된 건물에 대해 선교사 알렌(Allen)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펜젤러는 미국 공사관 건너편에다 적당한 교회를 건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 일에도 성공하였다. 모퉁이에 작은 탑이 있고 일반 민가처럼 생긴 이 멋진 벽돌 건물은 외국인 거주 지역에 발전된 모습을 더해 준 굉장한 것이었다. 이것은 배재학당의 멋진 벽돌 건물, 그리고 미국 공사관 반대편의 언덕 위에 솟아 있는 감리교 출판사처럼 이 사람의 열정어린 노력과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을 기념하는 하나의 비석처럼 우뚝 서 있다.
이 때 준공된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이 교회의 신도들은 독립협회운동, 여성해방운동, 인권운동 등을 활발히 전개해 나갔다. 독립협회의 서재필·이승만·이상재·윤치호 등도 교인이 되어 이 교회에서 예배를 보았다.
새 교회는 가운데에 휘장을 치고 예배를 보았으나(휘장은 1910년대 중반에 철거) 남녀가 한 지붕 아래서 집회를 가졌다. 이 당시 교회 남쪽 문으로는 배재학생들과 남자 신도들이, 북쪽 문으로는 이화학당 학생들과 여자 신도들이 줄을 지어 들어와 예배를 보아 정동 예배당은 예배를 매개로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자유공간이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정동교회 부지를 경운궁에 편입하고자 대토(代土)를 주고, 이를 매입하여 계약금 1만원을 지불한 뒤 잔금 2만 4,000원을 지불하지 않으므로 1901년 5월 30일, 미국공사 알렌이 한국 정부에 정동 토지대금을 속히 돌려주도록 요구하였다.
아펜젤러는 선교 활동 중 1902년 6월 첫주일에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에 앞서 「무지내교회」를 방문하기 위해 시흥지역 경부선 철도건설 현장을 지나가다가 주장이 엇갈려 일본인 노무자들에게 구타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인 노무자들이 이들을 러시아 간첩으로 잘못 알고 아펜젤러 일행의 길을 막고 행패를 부린 것이었다. 이 일로 인해 재판 증언 때문에 목포로의 출발이 지연되어 뒤따라 목포로 가기 위해 1902년 6월 11일 밤, 배를 타고 가던 중에 어청도 부근 해상에서 밤중의 짙은 안개로 인하여 다른 배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침몰되자 한국인 비서와 어린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선실로 내려갔다가 22 명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J. S. 게일 선교사는 아펜젤러의 순직에 대하여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그는 그의 생명을 성경 번역을 위해서 바쳤다. 이제 우리는 그 일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라고 평했다.
정동제일교회는 1935년 그의 기념비를, 배재학교 총동창회는 1989년 양화진 외국인묘지공원에 추모비를, 전라북도 군산시 내초도 온누리교회는 2007년 6월 11일, 아펜젤러의 순교 105주년을 맞아 그가 조난당한 바다에서 가까운 언덕에 ‘아펜젤러 순교기념교회’를 완공하고, 입당 예배를 열었다.
정동교회는 내부 면적이 115평으로 비좁았으므로 1916년에는 늘어나는 신자의 수용문제, 마루 예배 문제와 함께 건물 자체의 훼손이 문제가 되어 서북쪽을 증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22년에 이르러 교회당에 1,5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증축하자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리하여 일제 때인 1926년에는 좌우익랑(左右翼廊)을 확장하여 현재와 같이 돌출한 현관 부분까지 벽면이 일직선으로 되는 삼랑식(三廊式)으로 개축하여 175평으로 넓어졌다. 이에 따라 종래 라틴 십자가 형태를 취하던 건물 모양은 직사각형으로 바뀌었고, 내부구조도 많이 변했다.
1918년에 이화학당의 하란사(河蘭使)가 미국에 가서 강연하고 모금한 돈으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을 구입하여 설치하였으나 6·25전쟁 때 파괴되어 최근에 복원하였다. 1979년에 완공된 ‘선교 100주년 기념 예배당’ 현관에 안치되어 있는 이 종(鐘)은 1902년에 성경 번역차 목포로 가던 중 침몰 사고로 순직한 아펜젤러를 기념하여 미국에서 제작하여 들여 온 것이다. 한국인 최초의 신학자 최병헌(崔炳憲) 목사는 이 종을 ‘세상을 깨우치는 종’이라는 뜻으로 ‘경세종(警世鐘)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 종은 태평양전쟁 때 일제가 탄약 제조를 위해 징발하려고 떼어 놓아 주물공장으로 갈 뻔했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반출하지 못했던 아슬아슬한 일화가 남아있다.
6.25전쟁의 참화도 이 교회를 피해 가지는 않았다. 교회는 절반이나 부서져 버렸다. 따라서 예배당 중수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수리 작업을 하여 1950년 11월 23일 옛 모습대로 복원해 놓았다. 당시 경제적, 건축적, 문화적 인식이 그 정도에 머물렀던 것이다. 1977년에 정동제일교회는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다.
정동제일교회는 감리교 선교 80주년을 기념하여 1964년에 교회당 신축계획을 세워 1977년에 기공식을 올려, 1979년에 ‘선교 100주년 기념 교회당’이 완공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이 교회의 재건축과 수리를 놓고 논의가 많았다. 처음에는 벽돌은 풍화되어 상하고, 문도 휘어져 모든 점이 불편하므로 지붕과 바닥을 뜯고 더구나 벽도 철거하여 신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였다. 이에 문화재 교회 건물은 원형이 훼손될 위기에 봉착했으나 교단의 내분으로 시일을 보내다가 1977년에 정부의 문화재국이 사적으로 지정하여 건물의 원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1987년 3월 8일에는 화재로 사적으로 지정된 정동제일교회 건물의 내부 일부가 소실되었으므로 이를 보수하였다. 이 교회는 2000년 여름부터 복원 수리 문제로 내홍(內訌)을 겪었다. 1년에 걸쳐 보수 공사가 추진되어 2002년 3월 31일에 마감하고, 재 헌당되었다.
- 명소 : 원구단(?丘檀)
- 지정번호 : 사적 제157호
- 시대 : 1897년 (광무 원년)
- 소재지 : 서울시 중구 소공동 87번지 14호
서울의 한복판인 현재 조선호텔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대한제국이 설립된 원구단이 있었던 사적지이다.
이곳은 일찍이 조선 초의 태종의 둘째 공주(慶貞公主)와 부마 조대림이 거주하여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 불리어졌으므로 소공동이란 동명이 유래되었으며, 선조 16년(1853)에는 이 집을 화려하게 개축하여 3남 의안군 성(城)에게 하사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남별궁(南別宮)이라 하여 중국사신이 유숙하였다. 조선말에 지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남별궁에는 명설루(明雪樓)라는 누각이 있고, 그 뒤뜰에는 작은 정자가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돌 거북이 있는데 사람들이 영험하다고 하여 이 거북에게 빌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말에 외국세력이 밀려오던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에 즉위하기 위하여 조선호텔 현관 부근에 하늘을 본 따서 원형의 3층으로 된 원구단(?丘壇)을 쌓은 다음 백관을 거느리고 천신지기(天神地祗)에 제사를 지냈다.
이 원구단은 환구단, 또는 원단(圓壇)이라고도 불리는데 일제가 1913년 4월에 이 단을 헐어 버렸으므로 광복 후에 사적 제157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이 자리에 건평 580여 평의 조선총독부 철도호텔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9월에 준공하였다. 철도호텔 건물은 광복 후에 조선호텔로 사용하다가 1968년에 철거한 후 현재와 같은 고층 건물이 들어섰다.
현재 원구단 터에는 원구단과 석고단, 그 정문인 광선문(光宣門)은 훼손되어 보이지 않고, 8각형 3층 건물의 황궁우(皇穹宇) 한 채와 그 동쪽에 용무늬를 그린 북 모양으로 된 석고석(石鼓石) 3개만을 조선호텔 뒤쪽에서 볼 수 있다. 이 석고석의 용무늬 조각은 조선말의 최고 솜씨라고 알려져 있다.
황궁우는 원구단을 쌓은 지 2년 뒤인 1899년에 완공되었는데 이 건물의 상량문(上樑文)은 윤용선(尹容善)이 짓고, 서정순(徐正淳)이 글씨를 썼다. 그 후 1901년 12월에 광무황제의 성덕(聖德)을 찬양하기 위하여 관리들과 유지들이 모여 석고단을 세우기로 하여 이듬해에 준공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게 되었다.
원구단은 태조를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고 하늘과 땅의 신인 천신 지기에 제사를 올렸던 단이고, 황궁우는 천신 지기와 고황제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석고단은 중국 주(周)나라 때 선왕(宣王)의 덕을 칭송하는 글을 북 모양의 돌에 새겨 10곳에 세웠다는 고사가 있으므로 이를 본떠 고종의 성덕을 찬양하는 석고문(石鼓文)을 새긴 것이다. 이 석고단도 일제가 1927년에 광선문과 함께 헐어 버렸으므로 석고만 남은 것을 현재 자리로 옮겨 놓았다.
황궁우는 8각으로 쌓은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남쪽 섬돌로 오르내릴 수 있게 되어 있다. 3층 팔각집의 1 · 2층은 통 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앙에 신의 위패(位牌)를 모셔 놓게 하였으며 3층은 각 면마다 3개의 창을 내었다.
황제 즉위식은 고종이 아관파천에서 나와 덕수궁에 머물게 된 직후에 치르게 되었는데 이 의식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즉위식이 있던 날 아침, 고종은 지난 밤 꿈에 어느 선왕이 나타나 “예로부터 있어 온 유풍(遺風)을 변혁해서는 안된다”라며 노한 얼굴을 하고 사라졌다는 꿈 이야기를 근시(近侍)들에게 말하였다. 그리고는 즉위식장으로 떠날 시각이 훨씬 지나도 마련해 놓은 대연(大輦)에 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종은 40명이 메는 호화로운 대연을 보자 화를 내면서 4명이 메는 소연(小輦)으로 바꾸지 않으면 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3색기를 든 전위대가 앞을 서고 대신들이 말을 타고 뒤를 따랐으며 일본군의 호위를 받는 행렬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철종의 부마이며 내부대신인 박영효(朴泳孝)가 말에서 떨어지자 고종은 뒤돌아보고 ‘불길한 일이로다’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 즉위식이 있던 날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원구단 정문에 이르는 연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축기(祝旗)를 들고 환호하는 가운데 고종이 행차하였다. 원구단에서 하늘과 땅에 고하는 고천지제(告天地祭)를 지낸 다음 백관들이 무릎 꿇고 받드는 가운데 금빛 찬란한 즉위단 의자에 올랐다.
이 당시 수구파의 대신들은 이 황제즉위식을 반대하여 며칠 전부터 단식을 하고 있었고, 지방에서는 선비들이 망배(望拜)하면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본 외국인은 세계 역사상 이토록 즐겁지 않은 황제즉위식은 전무후무하다고 기록하였다.
황제즉위식을 올린 지 3년 후에도 광무황제는 대신들을 거느리고 원구단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삼엄한 경계 속에 행차하였다. 원구단에 포장을 두르고 제사를 올리는 데 갑자기 하얀 포장 틈으로 중 한사람이 불쑥 뛰어 들어와 초능력인 천안통(天眼通)으로 황제의 앞날을 예언하겠다며 큰소리치는 변이 일어났다. 엄숙하게 제사를 지내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제사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소란을 일으킨 중을 잡아 문초를 해보니 개운사의 승려임을 밝혀냈다. 이에 따라 개화를 주장한 봉원사의 이동인(李東仁) 승려 덕분에 한때 허용했던 승려의 도성 안 출입은 3년 만에 다시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건물 내에 한국적인 무늬를 볼 수 있으며, 호텔과 가까워 그곳에 머무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관람하기에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입장료와 입장시간은 제한되어있지 않다.
- 명소 : 한국은행 본관(韓國銀行 本館)
- 지정번호 : 사적 제280호
- 시대 : 1912년
- 소재지 :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3가 110번지
이 건물은 일본의 건축가인 다쯔노깅꼬(辰野金吾)의 설계로 1907년 11월 착공되어 1912년 1월에 완공되었다. 한공 당시에는 일본 제일은행 지점건물로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준공 후에는 1911년 8월 설립된 조선은행 본점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1950년 5월에 제정된 한국은행법에 의해 1950년 6월 대한민국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설립됨에 따라 이 때부터 한국은행 본점으로 사용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조는 지하1층, 지상2층의 화강석 석조건물로서 외벽은 화강석을 다듬어 붙이고 지붕은 철골조, 바닥판은 철골 철근콘크리트조이다. 외형은 H자형 편면의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현관 좌우 모서리에는 원형의 돔을 얹어 프랑스 성곽풍의 르네상스식 외관을 이루고 있다. 한국전쟁때 내부가 불타 버린 것을 1958년 1월 복구(復舊)하고, 1989년 5월에는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復原)하였다. 1987년 12월 이 건물 후면에 한국은행 신관이 준공되면서, 1989년부터 이 건물은 원형 복원되었다. 2001년 6월 내부 공사 후 화폐금융박물관을 개관하여 사용하고 있다.
화폐금융박물관에서는 한국은행의 주요 기능 및 역사, 그리고 국내외 화폐를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되어있다. 매주 일요일에는 가족과 함께 관람 할 수 있는 영화도 상영하고 있고, 금융에 관한 강좌도 이루어지고 있다.
관람시간은 화요일~일요일 10:00~17:00이며, 휴관일은 매주 월요일, 설날과 추석 및 공휴일, 근로자의 날이다. 입장료는 무료이다.
화폐금융박물관
문의 : 02) 759-4881~2
홈페이지 : http://museum.bok.or.kr
- 명소 : 남대문 한국전력 사옥
-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1호
- 시대 : 1928년
- 소재지 :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2가 5
이 건물은 1928년 경성전기주식회사 사옥으로 건립하였으며, 처음에는 5층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8·15광복 이후 옥상 부분에 2개층을 증축하였다. 내진설계 적용하고 엘리베이터, 그래스블럭과 장식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건축물이었다.
건물 내부도 철근 콘크리트 뼈대를 살리면서 내, 외부 건물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근대 건축의 건축적 보존가치가 있다. 현재에는 사무실 용도에 맞게 리모델링하여, 한국전력사옥으로 사용되고 있다.
- 명소 : 숭례문(崇禮門)
- 지정번호 : 국보 제1호
- 시대 : 1398년 (조선 태조 7년)
- 소재지 :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4가
가이 문은 조선시대 한성 도성의 정문으로 4대문 가운데 남쪽에 위치하므로 남대문으로도 불린다. 태조 7년(1398)년에 처음 건립된 후 세종 30년(1448) 크게 고쳐 지었다. 이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남대문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보물에서 국보 제1호로 되었다.
숭례문 주변의 성벽이 결정적으로 훼손된 1899년 서울 시내 전차(電車) 노선 공사와 개통으로 인하여 동대문ㆍ서대문이 주변과 함께 헐리게 되면서부터이다. 더욱이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파괴가 가속화되었고, 특히 숭례문 남쪽으로부터 남산이 정상에 이르는 성벽은 남산광장에 일제가 소위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전연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남산광장에서 정상에 이르는 도보 길에 일부가 남아 있다.
오래 전부터 숭례문은 남대문시장과 함께 시민들의 터전이었으며, 많은 사랑을 받아온 국보이다. 그러나 지금은 숭례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2008년 2월 숭례문은 화재로 2층짜리 목조 누각이 대부분 타버렸으며, 석축만 남아있다. 현재 2012년 완공을 목표로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